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비)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비, 창녕비, 황초령비,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루는 마운령비, 총 4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군주입니다. 대가야를 멸망시켰고, 나제 동맹을 기반으로 고구려도 몰아낸 뒤 백제도 몰아내어 한강 유역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현재 함경남도로 불리는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진흥왕의 정복 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비석입니다. 그러한 가치를 토대로 마운령비는 북한 국보 1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비문은 전체적으로 진흥왕이 지역을 순수하고 민심을 살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모가 심하지는 않아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있습니다. 진흥왕을 따라 수행한 사람들의 관명과 이름도 비문에 담겨져 있습니다. 신라의 관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의 비문은 상당히 유사한데 마운령비의 글자가 더 잘 남아있어 황초령비의 내용을 보완하는데에 마운령비의 비문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문의 원문을 해독한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앞면
태창원년(太昌元年) 세차(歲次) 무자(戊子) ○○ 21일 ○○ ○興大王(진흥대왕)이 ○○를 순수(巡狩)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무릇 순풍(純風)이 일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참됨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邪惡)한 것이 서로 경쟁하도다. 그러므로 제왕이 연호(年號)를 세움에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짐(朕)은 역수(曆數)가 몸에 이르러 위로는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다. 또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 보여주며, 명명한 가운데 신지(神紙)에 감응되어 부명(符命)에 응(應)하고 셈대에 적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스스로 헤아려 신구민(新舊民)을 무육(撫育)하였으나 오히려 말하기를 왕도의 덕화(德化)가 고루 미치지 아니하고 은혜가 베풀어짐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살펴서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고 재난의 기미(機微)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과 ○(상품)을 상(賞)으로 더하여 주고 공훈(功勳)을 표창하고자 한다. 수레를 타고 나가 10월 2일 계해(癸亥)에 이르러 … 인하여 변계(邊堺)지역을 설유(說諭)하였다.
뒷면
이때 수레를 따른 자로 사문(沙門) 도인(道人)은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다. 대등(大等)은 훼부(喙部) 거비부지(居朼夫智) 이간(伊干), 내부지(內夫智) 이간(伊干), 사훼부(沙喙部) 영역지(另力智) 잡간(迊干), 훼부(喙部) 복동지(服冬知)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 급간(及干), 미지(未知) 대나말(大奈末), 급진부지(及珎夫知) 나마(奈麻)이다. 집가인(執駕人)은 훼부(喙部) 만혜(万兮)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영지(另知) 대사(大舍)이다. 이내종인(裏內從人)은 훼부(喙部) 급혜차(汲兮次)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비시지(非尸知) 대사(大舍)이다. 약인(○人)은 사훼부(沙喙部) 위충지(爲忠知) 대사(大舍)이고, 점인(占人)은 훼부(喙部) 여난(与難) 대사(大舍)이고, 약사(藥師)는 독지차(篤支次) 대사(大舍)이다. 나부통전(奈夫通典)은 본피부(本彼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이고, ○○는 본피부(本彼部) 막사지(莫沙知) 길지(吉之)이고, 급벌참전(及伐斬典)은 훼부(喙部) 부법지(夫法知) 길지(吉之)이다. 裏內○○○○○○○名 길지(吉之)이고, 당래객(堂來客) 이래객(裏來客)은 50이고, 외객(外客)은 ○○ ○○○○○○○○○○智 사간(沙干)이다. 조인(助人)은 사훼부(沙喙部)의 순지(舜知) 나말(奈末)이다.
비문은 태창원년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삼국사기에도 진흥왕이 태창이라는 연호를 쓴 기록이 있어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더욱 뒷받침합니다. 또한, 태창원년이라는 말을 통해 비가 건립된 연도가 568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진흥왕이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568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29년(서기 568),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진흥왕
비문에 등장하는 순수라는 단어는 이 마운령비가 진흥왕 순수비로 불리는 이유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진흥왕은 이렇게 확장한 영토를 직접 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지배를 굳건히 했던 것입니다.
마운령비의 비문에는 사문도인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사문도인은 승려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국정과 전략수립에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 승려들은 진흥왕의 순행에 참여하면서 넓은 지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역할도 담당했을 것입니다.
집가인은 왕의 수레와 가마등의 기구를 관리하는 직책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왕과 왕족을 시중하고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입니다.
점인은 제사를 담당하는 직책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약사는 의학을 담당한 직책으로 보이고, 내부통전은 명확히는 알 수 없으나 순행과 제사를 지휘하는 직책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급벌참전은 진흥왕의 순행시 소홀한 모습을 보인 지방관과 촌주들에게 벌을 주는 역할이었습니다. 이내종인의 이내는 궁의 내부를 의미하므로 이내종인은 왕의 침전이나 집무실에서 시중을 드는 직책이었을 것입니다. 당래객은 왕과 신하의 국정 처리기관인 정전과 남당 소속의 인원으로 추측되고, 이내객은 침실과 집무실에서 왕을 보조하는 역할로 추정됩니다. 외객은 지방 업무를 맡은 하급관리로 보기도 하나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마운령비는 신라의 연호 사용과 진흥왕시기 진출영역, 국가 기관과 관원 등 다양한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석비입니다.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