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차돈 순교비는 신라의 불교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기리는 비입니다. 이차돈은 신라의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라에는 고구려의 묵호자가 눌지왕때 불교를 전래했지만, 신라에서 불교는 귀족들의 반발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못했고,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 법흥왕은 신라에 불교를 공인시키기 위해 고심하는데요, 이 때 이차돈이 희생을 자처하며 순교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피가 솟아올라 사람들이 놀라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차돈의 희생을 통해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게 되고, 이후에는 살생을 금하여 불교의 교리를 행했습니다. 이처럼 이차돈은 신라의 불교 공인을 도운 결정적 인물인 것입니다. 법흥왕의 불교공인과 이차돈의 희생은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5년(서기 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일찍이 눌지왕(訥祗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으나,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어보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알려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태우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한 곳에 정성이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태우며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임금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임금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다. 딸의 병이 곧 나았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가 왕성에서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받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며 말하였다.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소지 마립간) 때에 이르러 아도(阿道)[혹은 아도(我道)라고도 한다.]가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 시중을 들던 세 사람은 계속 머물러 살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불법을 믿는 이가 종종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하였으므로 임금이 난감해 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異次頓)[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저의 목을 베어 뭇 사람들의 분분한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본래 불도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저는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모두들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며, 말하는 논리가 괴상하여 정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저희들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홀로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의 심오함을 들어보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말이 단단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구나.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 쪽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
마침내 형리에게 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의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가 죽고서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았는데 그 빛깔이 우유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네이버 지식백과] 법흥왕 [法興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이차돈의 모습을 담다, 이차돈 순교비
이 글에서 다루는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의 불교에 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입니다. 이 비는 원래 백률사 터에 있었으나 이후 여러 기관을 거쳐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습니다. 비는 육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한 면에는 이차돈의 모습을 조각으로 새기고 나머지 5개의 면에는 이차돈에 대한 기록을 담았지만, 그러한 글자들은 심하게 마모되고 훼손되어 현재 판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행히도 삼국사기와 다른 역사 기록들에 이차돈의 행적이 남아있어 우리는 이차돈이 어떤 공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차돈의 희생으로부터 290년이 지난 818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이차돈의 목이 잘리는 장면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차돈 아래에 그려진 파도모양의 모양은 흔들리는 땅을 표현한 것입니다. 땅위에는 관을 착용한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잘린 목에서는 피가 솟구쳐 오릅니다. 솟아 오르는 피의 주위에는 꽃가루가 흩날립니다. 이러한 이차돈의 숭고한 희생 끝에 신라의 불교는 공인되고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차돈 순교비는 현존하는 불교 공인 관련 사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비석의 양식과 이차돈의 옷차림을 통해 당대의 복식과 조각에 대한 연구에도큰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