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5. 11:56ㆍ삼국의 유물 유적
출처: 문화재청
사택지적비는 백제의 비석으로, 백제의 금석문이 드문 가운데 매우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가집니다. 보물 1845호 입니다. 사택지적비를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백제의 인물인 사택지적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사택지적은 누구일까요?
백제의 고위관리 사택지적
사실 사택지적은 우리나라의 역사자료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삼국의 역사를 담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택지적이 등장하는 곳은 사택지적비와 일본의 역사자료인 일본서기입니다. 일본서기에서 사택지적은 대좌평 지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대좌평 지적"과 사택지적비의 사택지적은 대체로 같은 인물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월 정해 초하루 (중략) 백제 조문사의 종자(從者) 등이 "지난해 11월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윤(崑崙)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이 생략]
가을 7월 무인 초하루. 을해 백제 사신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 등에게 조당(朝堂)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떤 기록에는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智積)과 그의 아들 달솔(達率),은솔(恩率) 군선(軍善)이라 하였다.】이에 건장한 장정에게 명하여 교기(翹岐) 앞에서 씨름을 하게 했다. 지적(智積) 등은 연회가 끝난 후 물러나와 교기(翹岐)의 문전(門前)에 절하였다.
동북아 역사넷 일본서기, 고교쿠기 원년
이렇게 일본의 기록에서 사택지적은 백제의 사신 대좌평 지적으로 등장합니다. 대좌평은 백제에서 최고위급 관직이었기에, 사택지적은 최고위 귀족 계층의 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기록이 좀 이상하죠? 사택지적이 죽었다 했는데, 다음 기록에 대좌평 지적이 연회에 참석했다는 점이 수상합니다. 사택지적비가 발견되어 지적이 죽었다는 기록은 틀렸음이 확인됩니다. 최근에는 일본서기의 기록 배치가 잘못되어 사택지적이 교고쿠 원년(642년)이 아닌 사이메이 원년(655년)에 죽었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이에 따르면 사택지적비는 654년 11월에(655년 시점에서 지난해 11월 이므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택지적이 일본에서 사신으로 활동한 것과 그의 죽음 사이에 그는 백제의 관직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백제 국왕이었던 의자왕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누이 동생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의 기록
17년(서기 657) 봄 정월, 임금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을 주었다.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의자왕』
의자왕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들의 세력을 크게 위축시키게 됩니다. 기존의 귀족세력을 축출하고 자신의 서자들을 좌평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한 것입니다. 그러한 의자왕의 왕권 강화 정책으로 인해 사택지적은 결국 백제의 최고위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권력에서 밀려난 사택지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글의 중심인 사택지적비입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사택지적비는 갑인년이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는 654년으로 여겨집니다. 비록 중앙 권력에서 밀려났지만, 사택지적은 최고위 귀족층이었기에 이러한 비석을 세울 여력을 가졌을 것입니다. 비문은 사택지적이 세상의 덧없음을 탄식하고 불교에 의지하려는 모습을 담습니다. 권력에 밀려난 사택지적의 무상함과 허망함, 그리고 불교에 의지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비문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甲寅年正月九日 갑인년 정월 9일
奈祇城砂宅智積 내지성의 사택지적은
慷身日之易往 날이 갈수록 몸이 쉽게 노쇠해지고
慨體月之難還 달이 갈수록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여
穿金以建珍堂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짓고
鑿玉以立寶塔 옥을 다듬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巍巍慈容 높이 솟은 늠름한 모습은
吐神光以送雲 신령한 빛을 뿜어 구름을 보내는 듯 하고
峩峩悲貌 위엄 있고 비장한 용모는
含聖明以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날이 갈수록 몸이 쉽게 노쇠해지고'와 '달이 갈수록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여'에서는 도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백제에 도교가 널리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짓고, 옥을 다듬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에서는 사택지적이 불교에 의탁하려 했음이 드러납니다. 사택지적비에서는 도교와 불교의 모습을 모두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비문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덧없음을 탄식하는 감정은 자신이 모셨던 군주 의자왕의 왕권 강화책으로 권력에서 밀려난 사택지적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사택지적비는 극히 드문 백제의 금석문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유물입니다. 사륙변려체로 유려하게 작성된 비문에는 권력에서 밀려난 사택지적의 허망감과 도교의 무상함, 불교에 귀의하려는 한 사람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사택지적비는 백제 귀족의 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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