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왕후의 역사 속 모습을 살펴보자!

2021. 1. 22. 20:05카테고리 없음

철종

철종은 세도정치 시대에 왕으로 즉위했으나, 왕이 된 이후 조선 백성의 고통과 분노, 그 분노의 결과물인 민란을 지켜보고 떠난 임금입니다.

세도 정치로 가장 유명한 가문은 안동 김씨입니다. 안동 김씨 가문은 순조 이후부터 비변사라는 정치 기관을 장악하고 조선의 정치를 주관하고 권력을 장악햇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가문들과 이권을 나누어 일부 가문이 독점하는 정치인 세도정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철종의 왕비였던 철인왕후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철인왕후의 그 존재 자체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조순 초상

위 사진의 인물은 김조순입니다. 김조순은 안동 김씨의 주요 인물로, 그가 정권을 장악하고 정치를 주도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됩니다. 김조순은 정조의 정책에 찬성한 시파에 속했습니다.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기 전, 정조는 훗날 순조가 되는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정치적인 후원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정조는 여러번 정치적 고위직에 진출했던 명문가인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김조순은 이전에 패관문학에 심취한 잘못으로 정조에게 반성문을 썼을 때 명문을 지어 정조의 호감을 샀고, 정조의 여러 정책과 입장을 지지하는 시파의 입장에 있었기에 정조가 그를 택한 것입니다.

1800년에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을 때에도 김조순은 왕의 장인으로써 많은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조의 죽음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벽파는 소멸해 갔고, 이제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정치의 리더는 단연 김조순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조순은 이전의 가문들의 역사를 참고하여 시종일관 겸손한 태도를 보였고, 다른 가문들과 힘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겸손의 처신을 보인 김조순, 순조는 자신의 장인인 김조순을 무척이나 총애했습니다. 병체레가 잦고 정사에 열의를 상실한 순조는 비변사에 정치를 맡깁니다. 바로 이 순조 시대에 김조순은 백관을 총괄하고 국가 기밀을 담당했습니다. 바야흐로 안동 김씨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헌종의 초상화

김조순은 위세를 보이지 않고 겸손한 태도로 지냈지만, 순조 말기에 그가 죽고 헌종의 즉위 후 김조순의 아들들이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세도정치는 본격적으로 부패한 모습을 보입니다. 헌종은 나이가 어렸기에 순조의 왕후 순원왕후 김씨(바로 김조순의 딸)이 수렴청정을 했고, 이 시기에 세도정치는 순조 시절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갖춥니다. 훗날 성인이 된 헌종은 세도 가문을 제어하려 하지만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제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왕실은 새로운 왕을 맞아야 합니다. 순원왕후는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아들 이광의 3남 이원범을 선택하고, 그가 바로 철종이 됩니다.

순원왕후 김씨는 철종의 비는 자신의 가문인 안동 김씨 가문에서 고르지 않으려는 입장을 친정에 전잘하지만, 결국 철종의 비는 안동 김씨 가문의 일원인 김문근의 딸로 결정됩니다. 이 김문근의 딸이 바로 철인왕후입니다.

철인왕후의 간택이 진행된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의 모습

희정당에서 중궁전(中宮殿)의 삼간택(三揀擇)을 거행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대혼(大婚)을 김문근(金汶根) 집에 정하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주량(舟梁)092) 의 예(禮)를 이미 정하였다. 4세(世)의 충정(忠貞)한 의열(義烈)을 어찌 이루 추념(追念)할 수 있겠는가? 임인년093) 에 절의(節義)를 세운 여러 집안을 모두 특별히 절혜(節惠)094) 의 은전(恩典)을 내렸는데 하물며 이 집안이겠는가? 증 찬성(贈贊成) 김제겸(金濟謙)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논할 것이며, 증 이조 참의(贈吏曹參議), 김성행(金省行)에게는 찬성(贊成)을 더 추증하되 일체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논하라." 하였다.

철종실록 철종 2년의 기록

안동 김씨는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와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장악하며 강화했으므로, 새로 즉위한 임금 철종의 비도 안동 김씨의 구성원인 김문근의 딸로 결정하여 안동 김씨가 정국을 장악하고 주도하는 세도정치를 지속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즉, 철인왕후의 간택과 책봉은 세도정치를 강화하고 지속하려는 안동 김씨 가문의 의도가 반영된 행위인 것입니다.

철인왕후를 통해 임금의 장인이 된 김문근도 부원군에 봉해집니다.

전(前) 승지(承旨) 김문근(金汶根)을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으로 봉작(封爵)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았다.

이후 철인왕후의 책봉례는 거행됩니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전경
인정전

철종 2년 9월 25일, 창덕궁의 인정전에서 철인왕후는 철종의 비로 책봉됩니다.

인정전에 나아가 책비례(冊妃禮)를 행했으니,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중략)

그대 김씨(철인왕후)는 충량(忠良)한 화벌(華閥)의 후예요, 시례(詩禮)의 세가(世家) 명문(名門)이다. 견매(俔妹)123) 의 아름다운 명성이 일찍이 드러났고, 성모(聖母)의 휘음(徽音)을 계승하기를 생각하였다.(중략)

이에 사신(使臣)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과 행 용양위 대호군(行龍驤衛大護軍) 서좌보(徐左輔)를 보내어 절(節)을 지니고 예(禮)를 갖추어 왕비로 책봉하노라. 아!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곤위(壼闈)에 임하고, 효경(孝敬)으로 가르침을 받들게 하라. (생략)

이후 철인왕후는 철종의 왕비가 되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당시 왕실의 중요한 일은 후사를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정조 이후로 왕실의 자손은 점점 귀해졌습니다. 순조가 죽기도 전에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죽었으며,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습니다. 철종도 이렇게 왕살의 직계 자손이 사라진 상황에서 즉위하였습니다. 그런데, 철인왕후가 원자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신시(申時)에 원자(元子)가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에서 탄생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철종 실록 철종 9년 10월 17일

왕실의 자손이 생기게 되어 순원왕후와 철종, 철인왕후의 기쁨이 아주 컸을 것입니다. 철종의 기쁨도 매우 컸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원자가 탄생하자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원자궁(元子宮)을 안고 나와서 제신(諸臣)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였다.

영의정 정원용이 말하기를,

"전하의 복록은 임금으로서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 조종(祖宗)께서 쌓아 오신 덕업(德業)을 계승하고 종사(宗社)가 억만년을 이어갈 경사를 받으셨으며, 곤전(坤殿)께서는 관저(關雎)와 인지(麟趾)009) 의 덕이 있고 원자(元子)께서는 천일(天日)과 용봉(龍鳳)의 자태를 지니셨으니, 전하께서는 참으로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문왕(文王)010) 이십니다."

하였다.

철종이 직접 원자를 안고 나와 신하들에게 보였을 만큼 기쁨은 컸습니다. 그러나, 원자 탄생 6개월 후 조선 왕실에 비극이 찾아옵니다.

진시(辰時)에 원자(元子)가 졸서(卒逝)하였다.

철종 실록 철종 10년 4월 23일

철인왕후가 낳은 원자가 죽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왕실은 매우 큰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결국 철종도 이후 제대로 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고맙니다.

철종이 죽고, 정국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에게 넘어갑니다. 철종의 비 철인왕후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생을 이어가다가 1878년에 죽게 됩니다.

철인왕후가 세상을 떠난 창경궁 양화당

대비 전하(大妃殿下)께서 승하(昇遐)하였다.

고종실록

철인왕후 김씨, 강화도령이었다가 왕위에 갑자기 오른 철종의 비가 되어 왕비의 인생을 살고 원자를 낳았으나 1년도 안되어 죽게되고, 결국 조용히 조선 왕비의 삶을 살던 그녀는 이렇게 죽은 것입니다.

고종 15년에 그녀에게는 철인이라는 시호가 주어집니다. 그렇게 철인왕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대행 대비(大行大妃)의 지문(誌文)에,

"우리 철종 대왕비(哲宗大王妃)께서 병으로 편치 않다가 무인년(1878) 5월 12일 인시(寅時)에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에서 승하(昇遐)하셨으니, 춘추는 42세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엄숙한 여막에서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신은 대비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지문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어 친히 지은 행록(行錄)을 내려 보냈으니, 다음과 같았다.

‘대비께서는 정유년(1837) 3월 23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의 사제(私第)에서 탄강(誕降)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을 공순히 받들었는데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혹시라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병이 있으면 걱정하는 표정이 매우 불안하였고 병이 회복되면 처음과 같았다. 동기를 사랑하는 것이 지성에서 나왔으며 어른을 섬기는 예절을 게을리 하지 않고 능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침묵하며 말이 적었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덕과 도량이 일찍 성숙하여 근엄하기가 마치 어른 같았고 내외의 친척들이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생략)

아아! 원통하다. 왕후는 신해년(1851)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무오년(1858)에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계해년(1863)에 여러 신하들이 명순(明純)이라는 존호를 올렸고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대비(大妃)라는 칭호를 올렸다. 3년 병인년(1866)에는 휘성(徽聖)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정원(正元)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10년 계유년(1873)에 수녕(粹寧)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고, 이때에 와서 철인(哲仁)이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휘호(徽號)는 경헌 장목(敬獻莊穆)이고 전호(殿號)는 효휘(孝徽)이다. 산릉(山陵)은 예릉(睿陵)과 같은 언덕에 정하고 초하루가 정미일(丁未日)인 9월 18일 갑자일(甲子日)에 왼쪽에 부장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하면 평상시 매우 가까이하던 뜻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예릉
예릉 전경

철종과 철인왕후는 경기도 고양시의 예릉에 함께 묻혔습니다. 철인왕후와 철종의 삶은 아직도 기록을 통해 후세에 전해집니다.

철인왕후는 현재 드라마로 소개되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강화도령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그녀는 조선 왕비의 삶을 살아낸 인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