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근대사(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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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사 이야기: 예산문제의 지속!
제2,3,4 의회에서도 예산을 둘러싼 갈등은 지속되었습니다. 마쓰카타 내각이 성립되는데, 민당연합과 번벌정부는 이 시기에도 예산을 둘러싸고 대립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산을 사용하자는 적극정책과 민력휴양이 대랍한 것입니다. 이러한 갈들이 증폭되자 중의원이 해산되기도 했습니다. 제2회 총선거는 1892년 2월에 실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선거 간섭이 있었습니다. 민당인사들의 선거 운동이 방해받아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의 초기 의회와 초기 선거는 갈등과 반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제3의회에서는 예산안이 부결되기도 했습니다. 정부에 대한 규탄도 증가하였습니다. 제4 의회에서는 보다못해 천황이 직접 건함조칙을 내려 예산안이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천황이 이렇게 직접 나서자 민력휴양의 정당성이 점..
2021.02.17 -
일본 근대사 이야기: 경제 발전과 의회 출발
이번 글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급격한 경제 발전과 초기 의회에 대해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청나라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됩니다. 이 배상금은 당시 일본의 4년치 국자 재정 이상일 정도 막대했습니다. 이 자본을 기반으로 일본은 정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였고, 회사의 설립과 살비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였습니다. 면직업도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1894년에서 1901년까지의 증가를 보자면, 면사의 생산은 2.3배가 증가했고, 기선의 보유량은 3.4배가 증가하였습니다. 철도 개통 노선은 1.9배가 증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야하타 제철소도 건설되었는데, 1904년에 이 제철소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가동이 이루어졌고, 1906년에는 일본 철강 생산의 ..
2021.02.16 -
일본 근대사 이야기: 삼국간섭과 대만통치
이번 글에서는 삼국간섭과 대만통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직후, 요동 반도를 일본에 할양한다는 내용에 항의한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와 프랑스, 그리고 독일이었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 둑일은 일본의 요동 반도 영유 철회를 권고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이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요동 반도를 돌려주었습니다. 그 대신 청으로부터 일본은 추가적인 배상금을 획득했습니다. 이로인해 일본 내부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날로 커져갔습니다. 일본은 또한 대만 통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일본은 대만은 가지게 된 것입니다. 대만민주국의 건립을 비롯한 저항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고토 신페이를 주도로 식민지 경영을 본격화하게 됩니다. 청일전쟁의 여파로 일본은 열강의 견제..
2021.02.15 -
일본 근대사 이야기: 청일전쟁의 전개와 결과
이번 글에서는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을 살피겠습니다. 먼저 천진조약을 살펴봅시다. 천진조약 제3조: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 청일 양국 모두 사전에 이를 서로 알린다. 이 천진조약의 조항이 발동되는 계기가 생깁니다. 바로 동학농민운동입니다. 조선의 농민들은 조선 지방 수령들의 엄청난 수탈에 넌덜머리가 났습니다. 결국 둥학농민운동이 발생하여 농민들은 수탈과 탐학에 저항했습니다. 조선은 그런데 청에게 원병을 요청했습니다. 국내의 일인데도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결국 청나라는 2,500여명의 군대를 파병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진조약을 빌미로 일본도 8,000여명의 군대를 파병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고 전주화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제 조선 조정은 청과 일본에 철군할 ..
2021.02.14 -
일본 근대사 이야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일본의 태도는?
이번 글에서는 조선에서 발생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일본 근대와 연관지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전개되면서 대외팽창을 원했습니다. 그랬기에 1870년대에 대만을 침공하고 류큐를 병합한 것입니다. 그 시기에도 정한론이 제기되었으나, 아직은 내치가 우선이라는 판단에 정한론은 잠시 유보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을 둘러싼 대립이 점차 본격화됩니다. 임오군란은 조선 정부의 개화정책으로 인해 비롯된 군란입니다. 조선 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을 설립하고 미국에 보빙사,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조사시찰단,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는 등 개화에 백차를 가했습니다. 거기에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육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별기군을 조직하고 양성하는 동안 구식 군인들..
2021.02.13 -
일본 근대사 이야기: 청일 전쟁 이전의 양국관계 대만침공과 류큐처분!
이 글에서부터는 청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살피겠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은 1871년에 청일수호조규를 맺게 됩니다. 이 조규는 상호대등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상호 불가침의 특성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사 재판권도 상호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최혜국대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청일수호조규에서 알 수 있듯이 청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처음에는 대등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살피게 될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 양국의 관계는 조금씩 변화하게 됩니다. 먼저 대만 침공을 살펴보겠습니다. 1871년, 류큐의 조난민이 대만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본은 당시 류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를 빌미로 류큐 주민을 공격한 것은 일본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하고 대만을 침공합니다. 청나라는..
2021.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