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원) 고구려비

2021. 1. 14. 10:58삼국의 유물 유적

충주 고구려비

출처: 문화재청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구려 석비입니다. 국보 205호입니다. 예전에는 이 석비가 중원군에 있었기에 중원 고구려비로 불렸지만, 이후 중원군과 충주시가 합쳐져 현재는 충주 고구려비로 불립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의 석비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큽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견뎌왔기에 비문의 마모가 매우 심한 상태입니다. 석비의 4면에는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마모가 너무 심해서 앞쪽과 왼쪽 옆면 일부만 판독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앞면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상왕공(相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이 다스리는) 땅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 매금의 사람들이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前部)의 대사자 다혜환노와 주부 도덕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귀도(貴道) …… 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 中 …… 城不 …… 村舍 …… 沙…… 班功 …… 節人 ……신유년(辛酉年) …… 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행 전체 마모) 上有 …… 酉 …… 동이 매금의 영토 ……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于伐城)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상단부

출처: 문화재청

하단부

출처: 문화재청

충주 고구려비의 비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장수왕 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남진정책을 추진하고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여 백제의 왕 개로왕을 전사시킨 것으로 잘 알려진 왕입니다. 또한 중국의 남북조와 우호관계를 맺고 활발한 외교를 펼친 것도 장수왕의 업적입니다.

9월, 임금(장수왕)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서울(수도) 한성(漢城)을 점령한 후, 백제의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六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서기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수왕 [長壽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62년(서기 474) 봄 2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나라와 더불어 송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二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遣使入宋朝貢

충주 고구려비

출처: 문화재청

충주 고구려비는 이러한 장수왕이 남한강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세운 개척의 석비로 추정됩니다. 장수왕이 건립한 고구려비가 충주에 있었다는 것은 장수왕 재위기의 고구려가 활발한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충주 지역까지 점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또한 이 석비의 비문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제 고려태왕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고려가 고구려의 다른 국호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문에는 제위, 대사자, 발위사자 등 고구려의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관직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의비문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 측면에서 주목할 부분은 "신라토내당주"라는 부분인데, 신라의 땅 안의 당주라는 이 표현을 통해 당시 고구려가 신라의 영토 내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뒷받침됩니다. 또 이 비문에는 신라가 동이매금으로 지칭되어 고구려가 신라를 어떤 명칭으로 불렀는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라 관련 기록과 함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10년 (서기 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 國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그래서 라인(羅人)을 戍兵으로 두셨다.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신라를 지원해 왜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신라 관련 기록, 여기서도 고구려는 매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중국에 위치한 또 다른 고구려의 비석인 광개토대왕릉비와도 접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에서 등장하는 고모루성이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등장한다는 점이 바로 접점입니다. 이를 통해 충주 고구려비가 명백한 고구려의 비라는 점이 확인됩니다.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문 중에서

충주 고구려비

출처: 문화재청

충주 고구려비

출처: 문화재청

충주 고구려는 국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중대한 가치를 가집니다. 이러한 중요성을 토대로 충주 고구려비는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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