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4. 11:05ㆍ삼국의 유물 유적
출처: 문화재청
신라의 판결을 밝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밭갈이 중에 발견된 신라의 비입니다. 이 신라비는 재산분배의 내용을 확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글자가 새겨진 곳은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입니다. 이 비는 지증왕 시대인 503년에 세워졌습니다.
출처: 문화재청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 비는 절거리라는 사람의 재산의 소유와 유산 상속을 기록한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여러 귀족이 등장하여 일을 처리하는데, 이는 왕권 강화 이전에 귀족의 힘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신라의 정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소를 잡아 고한다는 글을 통해 소를 잡는 것이 신라의 풍속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전면(前面)
사라(斯羅)의 훼(喙)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교시(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시었다.
1문단의 주요내용은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절거리의 재산소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계미년(癸未年) 9월 25일, 사훼(沙喙)의 지도로(至都盧) 갈문왕(葛文王)·사덕지(斯德智) 아간지(阿干支)·자수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干支)와 훼(喙)의 이부지(尒夫智) 일간지(壹干支)·지심지(只心智) 거벌간지(居伐干支)와 본피(本彼)의 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와 사피(斯彼)의 모사지(暮斯智) 간지(干支), 이 7왕(王)들이 함께 의논하여(共論) 교시하였으니, 전세(前世)의 두 왕(王)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재물(財物)을 모두 절거리(節居利)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교시(敎示)를 하셨으니 절거리(節居利)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재물(財物)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다시 교시하셨으니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뒤에 다시는 이 재물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후면(後面)
만약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重罪)를 준다고 교시하셨다.
2문단의 주요내용은 지도로 갈문왕 이하의 신라의 중앙 정치 체제인 6부의 고위관리 7명이 사부지왕과 내지왕의 결정을 다시 확정하고 절거리의 유산상속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전사인(典事人)은 사훼(沙喙)의 일부지(壹夫智) 나마(奈麻), 도노불(到盧弗)·수구휴(須仇休)와 훼(喙)의 탐수(耽須) 도사(道使) 심자공(心訾公)과 훼(喙)의 사부(沙夫)·나사리(那斯利), 사훼(沙喙)의 소나지(蘇那支)이다. 이 7인(人)이 삼가 사뢴바 일이 완결되어 소를 잡고 널리 고하였기에 이에 기록한다.
3문단의 주요내용은 파견된 전사인 7명이 고위관리 7명의 결정을 확인하고 소를 잡아 제의하며 포고하는 것입니다.
상면(上面)
촌주(村主) 유지간지(臾支干支)와 수지일금지(須支壹今智) 이 두 사람이 그 해에 일을 마쳤으므로 이에 기록한다.
4문단은 비의 건립자와 건립 시기를 담고 있습니다.
1: 갈문왕의 존재
먼저, 지증왕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갈문왕의 자리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갈문왕은 무엇일까요? 갈문왕은 신라에서 왕의 근친에게 주던 작위로, 신라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갈문왕의 개념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어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의 갈문왕도 그렇습니다. 지증왕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시기 이미 왕이었는데, 굳이 갈문왕의 칭호가 쓰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갈문왕은 아직은 미지에 가까운 신라의 제도입니다.
2: 7왕의 존재
그리고 또 알 수 있는 점은 고위 관리 7명을 7왕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위관리를 왕으로 칭한다는 점에서 신라의 정치체제가 아직은 부족제의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국호 '사라'
신라의 국호가 사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신라'라는 국호는 바로 이 포항 냉수리 신라비가 세워진 지증왕 시대에 정해진 것입니다. 이 '사라'라는 호칭은 지증왕의 신라 국호 확립 이전 다양했던 신라의 국호를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지증왕 4년(서기 503)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또 옛부터 나라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으로 칭하였고 존엄한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여러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리옵니다.”
임금이 이 말에 따랐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 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네이버 지식백과] 지증왕 [智證⿇⽴⼲]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4: 소를 잡는 풍속
신라인들은 소를 잡아 제의를 지내는 풍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됩니다. 신라의 이러한 모습은 이후 법흥왕 시기에 세워진 울진 봉평 신라비에서도 묘사됩니다.
신라 6부가 얼룩소를 잡아서 <해석 불가> 일을 맡은 대인은 훼부 내사지나마, 사웨부 일등지나마, 구사사족지, 훼부 비수루사족지, 거벌모라도사 졸차소사제지, 실지도사 오루차소사제지이다.
- 울진 봉평 신라비 중에서
5 신라에 지방 통치 개념이 생각보다 일찍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는 촌주와 고사 등의 지방 관직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래 6세기 초에 지방제도가 실시되었을 거라는 기존 연구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신라의 지방 제도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런대 아직 지방에 완벽한 통제를 한 것은 아니며, 지증왕, 법흥왕 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봅니다.
신라 연구총서를 살펴보면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 나타나는 신라 정치의 모습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1: 7왕과 부족 체제
7왕의 명칭과 부족 합의체의 모습이 이 비문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지증왕이 왕을 칭했으나 아직 신라에서는 부족 합의체의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2: 사탁부의 갈문왕, 잔존한 부족제
이 비문에서 지증왕은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으로 지칭됩니다. 따라서 지증왕이 왕이긴 했어도 아직 6부 체제의 일부인 사탁부에 소속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아직은 부족 체제가 남아있습니다.
3: 김씨 왕족의 주도
그러나 완전히 부족 체제에 머무른 것은 아닙니다. 김씨의 왕족으로 이루어진 사훼(사탁부)와 훼(탁부)의 인원은 5인으로 다수이고, 나머지 본피와 사피에선 1인씩 7왕에 참석했습니다. 이는 당시 신라의 정치가 엄연히 김씨 중심으로 전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리하자면 포항 냉수리 신라비 기록 당시에는 6부 체제 속에서 부족 협의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었으나. 김씨 왕족이 엄연히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 정치체제는 지증왕이 왕의 칭호를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개혁을 시행하는 역사적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문화재청
이렇게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당시 신라의 판결방식 뿐 아니라 신라의 정치적 구조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특히 지증왕의 개혁을 이해하는데 있어 이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매우 중요합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국조 26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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