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4. 13:05ㆍ삼국의 유물 유적
출처: 문화재청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 시기에 건립된 신라의 비입니다.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영토였던 충청북도 단양 지역을 진흥왕 때 신라가 차지하게 되면서 이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아래 부분이 땅 속에 묻혀져 있었는데, 그랬기에 글자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전체 글자수는 400여자로 추측되는데, 그 중 288자가 남아있어 판독할 수 있습니다.
순수비는 아니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 시기의 비는 맞으나 진흥왕 순수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수비는 왕이 직접 순행하는 과정에서 세운 비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의 순행 과정이 아니라 정복 활동 이후 세운 것이고 내용도 순행이 아니라 포상을 담고 있으므로 순수비는 아닙니다.
비문의 내용
전체적인 내용은 신라가 적성 지역을 점령하는데 도움을 준 적성의 현지인 야이차와 가족등의 인물들을 포상하고 그 지역의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내용입니다. 전체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년]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豆弥智) 피진간지(佊珎干支),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부지(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礼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軍主들인 喙部 출신의 比次夫智 阿干支, 沙喙部 출신의 武力(무력, 즉 김무력)智 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설지(噵設智)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성(城) 당주(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이 때에 적성(赤城) 출신의 야이차(也 次)에게 교(敎)하시기를 중에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이후 그의 처(妻)인 삼(三) 에게는 이(利)를 허(許)하였다. 사년(四年) 소녀(小女), 사문(思文) 공형(公兄)인 추문촌(鄒文村) 출신의 파진루(巴珎婁) 하간지(下干支) [전(前)]자(者)는 다시 적성연(赤城烟)으로 가게 하고 후자(後者) 공형(公兄)은 이엽(異葉)이건 국법(國法)에는 분여(分與)하지만 비록 그러하나 이(伊) 자(子), 도지(刀只) 소녀(小女) 오례혜(烏礼兮) 찬간지(撰干支) 법(法)을 적성연사법(赤城佃舍法)으로 만들었다. 별도로 관(官)은 불혜(弗兮) 여(女), 도두지우열리파(道豆只又悅利巴) 소자(小子), 도나혜(刀羅兮) 합하여 5인에게 를 내렸다. 별도로 교(敎)하기를 이후로부터 나라 가운데에 야이차(也尒次)와 같이 옳은 일을 하여 힘을 쓰고 남으로 하여금 일하게 한다면 만약 그가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나이가 적건 [많건] 형제이건 이와 같이 아뢰는 자가 대인(大人)인가 소인(小人)인가 부(部) 출신의 나불탐사실리(奈弗耽郝失利) 대사(大舍), 추문(鄒文)[촌(村)] 물사벌성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은 니리촌(那利村) 인(人)은 물지차(勿支次) 아척(阿尺), 서인(書人)은 탁부(喙部) 출신의 인(人), 석서립인(石書立人)은 비금개리촌(非今皆里村) 지(智) 대오(大烏)이다.
이사부, 김무력 등의 존재, 진흥왕의 비임을 밝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심이 되는 내용은 적성의 현지인 야이차가 신라의 적성 점령을 도우다가 죽게되어 야이차와 그 일족을 포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문에는 그러한 중심내용 이외에도 지증왕과 진흥왕 시기에 활약한 이사부와 진흥왕 시기에 큰 전공을 세운 김무력 등의 인물들이 언급되어 이 비가 진흥왕 시기의 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라 왕권의 강화
울진 봉평리 신라비 에서 모즉지 매금왕으로 불린 법흥왕이 6부에 소속되어 있던 것과 달리, 이 단양 적성비에서의 진흥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볼 때 지증왕과 법흥왕을 거쳐 진흥왕 시대에 이르면서 신라국왕의 권력이 상당히 강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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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리 신라비
출처: 문화재청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신라의 모습을 아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물입니다.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글자는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비는 법흥왕 11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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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율령체제와 법의 탄생과정
그리고 그리고 국법과 적성연사법 등의 용어가 등장하여 진흥왕 당시의 신라는 율령 기반의 통치체제가 활발히 작동하는 상태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성 지역의 관습법을 적성연사법으로 공인한 점에서 신라에서 법이 만들어지는 사례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또, 야이차의 포상사례에서 출발하여 신라를 돕는 사람에 대한 포상자를 일반화하고 통용시키는 모습도 살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단양 신라 적성비는 신라의 사회적, 군사적, 정치적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가치를 토대로 단양 적성 신라비는 국보 19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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