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봉평리 신라비

2021. 1. 14. 11:10삼국의 유물 유적

울진 봉평리 신라비

출처: 문화재청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신라의 모습을 아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물입니다.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글자는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비는 법흥왕 11년(서기 524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법흥왕을 이해하는데 있어 이 비는 매우 중요합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울진지역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면서 주민들의 저항이 일어나자 신라의 중앙에서 6부 회의를 열게 되고, 대인을 파견하여 처벌을 내리고, 추가적인 저항을 막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원문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갑진년 정월 15일에 훼부(喙部) 모즉지 매금왕(牟郞智寐錦王), 사훼부(沙喙部) 사부지 갈문왕(徙夫智葛文王), 본피부(本波部) □부지(□夫智) □간지(□干支), 잠훼부(岑喙部) 미흔지(美昕智) 간지, 사훼부 이점지(而粘智) 태아간지(太阿干支), 길선지 아간지(吉先智阿干支), 일독부지 일길간지(一毒夫智一吉干支), 훼[부] 물력지 일길간지(勿力智一吉干支), 신육지 거벌간지, 일부지 태나마, 일이지 태나마, 모심지 나마, 사훼부 십부지 나마, 실이지 나마 등이 교시하신 일이다.

별도로 교시하셨으니, 거벌모라의 남미지는 본래 노인이었다. 비록 노인이었으나 전에 왕이 크게 법을 교하시었다. <해석불가> 대노촌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머지는 여러 노인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하시었다.

신라 6부가 얼룩소를 잡아서 <해석 불가> 일을 맡은 대인은 훼부 내사지나마, 사웨부 일등지나마, 구사사족지, 훼부 비수루사족지, 거벌모라도사 졸차소사제지, 실지도사 오루차소사제지이다. 거벌모라 니모리일벌, 미의지파단. □지사리일□지, 아대혜 촌사인 나이리는 곤장 60대, 갈시조촌사인 나이리거□철, 남미지촌사인 익□근리는 곤장 100대다. 실지군주 훼부 개부지나마.

이 글을 쓴 사람은 모진사리공길지지와 사훼부 선문길지지다. 글을 새긴 사람은 훼부 술도소오제지와 사훼부 모리소오에지다.

울진 봉평 신라비 비문 탁본

출처: 문화재청

이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인법과 장 60대, 신라 율령의 근거가 되다

먼저 중요한 것은 "노인법"의 등장인데요, '노인법'이라는 법이 존재했다는 것은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법흥왕 7년(서기 520) 봄 정월,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등급을 정하였다.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삼국사기 법흥왕의 율령반포 기록

율령은 행정 명령을 말하는 '영'과 형벌을 의미하는 '율'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형벌로 '장 60대'와 '장 100대'가 등장하여 법흥왕 시기에 율령체제가 존재했다는 점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노인법도 이 울진 봉평 신라비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기록에서 노인이란 단어의 의미는 원래는 신라인이 아니었다가 신라에 의해 점령당해 복속되어 신라에 예속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노인법'이라는 법은 신라가 신라에 예속된 노인들을 관리하는데 사용된 율령체계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정리하자면, 법흥왕이 520년에 율령을 반포한 이후 신라가 영토를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점령을 통해 예속시킨 노인들을 관리하고 단속하는 율령을 시행하여 신라의 통치 영역을 확장하려는 모습으로 울진 봉평 신라비의 내막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라 6부의 실마리를 주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또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6부에 대한 기록입니다. 6부는 신라의 정치체제인데요, 울진 봉평 신라비의 6부에 대한 기록은 6부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6부는 6세기 중반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져왔으나, 이 기록으로 6세기 초, 혹은 그 이전까지 6부의 존재기가 앞당겨졌습니다. 그리고 6부에서의 왕의 존재도 엿볼 수 있습니다. 위의 울진 봉평리 신라비 기록에서 등장하는 모즉지 매금왕은 바로 법흥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법흥왕은 탁부(훼부)를, 그의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은 사탁부(사훼부)를 관장하는 모습이 기록에서 보입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탁부 소속의 매금왕이 친족을 사탁부에 포진시켜 정치적 영향권을 확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즉지 매금왕, 즉 법흥왕이 훼부(탁부)에 소속된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왕이 부에 소속되어 있어, 왕이 6부를 초월하는 권력을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관등의 존재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관등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태아간지, 일길간지, 태나마, 나마 등의 명칭이 등장합니다. 이런 명칭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17관등의 명칭들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이러한 명칭들을 관등으로 볼 경우, 공복과 관리의 위계를 정했다는 법흥왕의 삼국사기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법흥왕 7년(서기 520) 봄 정월,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등급을 정하였다.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소를 잡는 풍습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기록에는 얼룩소를 잡는 기록이 등장하는데요, 이렇게 소를 잡는 기록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 이전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도 발견되어 신라의 소를 잡는 퐁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7인(人)이 삼가 사뢴바 일이 완결되어 소를 잡고 널리 고하였기에 이에 기록한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중에서

울진 봉평리 신라비

출처: 문화재청

이렇게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신라에서의 왕권의 위치와 법흥왕 시기 율령의 반포, 관등의 존재, 6부의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이러한 가치를 토대로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국보 24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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