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근대사 이야기: 조선의 상황 세도정치 고종 흥선대원군 신미양요 병인양요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2021. 1. 27. 10:14일본의 근대사

청나라가 엄청난 굴욕과 치욕을 당하고 있는 동안,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일본의 개항, 청나라의 아편전쟁과 온갖 조약들이 일어났던 시기는 조선의 헌종과 철종 시대였습니다.

 조선은 이 시기에 쇠퇴의 침체에 빠져있었습니다.

 

네, 바로 세도정치의 시대였습니다. 안동 김씨 가문을 비롯한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차지 하였고, 그렇게 조선의 정치는 부패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침체와 도탄에 빠졌습니다.

페리 제독

일본에 페리 제독이 들이닥친 것은 1853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것은 1858년입니다.

아편전쟁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난 것은 1840년, 난징 조약은 1842년, 제2차 아편전쟁 발발은 1856년입니다.

이렇게 청나라와 일본이 서구 열강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을 시기에, 조선은 아무것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조선 조정도 청나라와 일본의 엄청난 사건들을 알았습니다.

다음은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입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헌교(鄭獻敎)의 장계(狀啓)에 ‘관백 승습 고지 차왜(關白承襲告知差倭)026) 의 말에, 「노서아(魯西亞)·불란서(佛蘭西)·영길리(英咭利)·아묵리가(亞墨利加) 등 네 나라가 폐방(弊邦)027) 과 통화(通貨)한 까닭으로 이를 각별히 서계(書契)를 갖추어 별폭(別幅)으로 드립니다.」고 하였으니, 일에 따라 왕복하는 것은 교린(交隣)하는 사이에 일이 있으면 서로 알린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으니, 회답(回答)하는 서계를 지어서 속히 내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노서아(러시아), 불란서(프랑스),영길리(영국), 아묵리가(아메리카, 즉 미국)과 통교했음을 알립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이제 막 재자관(䝴咨官)의 수본(手本)을 보건대, 황제(皇帝)가 열하(熱河)로 이필(移蹕)하여 아직도 환도(還都)하지 않았다고 하니, 마땅히 전개(專价)043) 를 보내어 분문(奔問)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며, 사명(使名)은 열하 문안사(熱河問安使)로 계하(啓下)하여 차출(差出)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청나라 황제가 열하로 피신한 것을 알게 된 조선 조정(1860)

돌아온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中國)의 비적(匪賊)은 어떠하며, 인심(人心)은 어떠한지를 듣고 본 대로 상세히 진달함이 옳겠다."

하니, 신석우(申錫愚)가 말하기를,

"양이(洋夷)와 억지로 화친(和親)하였지만 외구(外寇)가 점점 치성하여 황가(皇駕)가 북수(北狩)하기에 이르렀으니, 천하(天下)가 어지럽지 않다고 이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궐(城闕)·궁부(宮府)·시창(市廠)·여리(閭里)는 편안하기가 옛과 같고, 장병이 교루(郊壘)에 주둔해 있는데 기색(氣色)은 정돈되어 태연하며, 적(賊)이 근성(近省)에 숨어 있는데 방어함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니, 이는 민심(民心)이 일에 앞서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조정의 계략도 기한을 주어 군색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서구 열강의 군대가 중국을 휘젓는 것을 알게 된 조선 조정(1861)

이 외에도 많은 이양선들이 조선의 해안에 침범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별다른 대책을 내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국제 정세에 대비하지 못하는 와중에 수령들의 수탈이 심해져 1862년에는 대규모의 농민 봉기가 발생하기까지 합니다.

즉 내부가 안정되고 강해야 외부의 급변에 대비하는 것인데,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내부부터가 심각하게 썩어있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

그나마 1863년에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내부의 수탈은 진정됩니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를 폐지하여 일부 가문들의 권력 기반을 제거하고,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들에게서도 군포를 거두고, 서원의 상당수를 없애고 사창제를 실시하는 등 개혁을 펼칩니다. 그러나 그의 집권기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을 겪으며 서양 열강과 심대하게 대립합니다.

척화비

척화비의 건립은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방침을 잘 보여줍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집권합니다. 이후 일본이 메이지 정부의 수립 후 조선에 접근합니다.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운요호

일본은 자신들이 당했던 무력 시위, 함포 사격을 조선에 사용합니다.

그리고 결국 일본과 조선은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합니다.

강화도조약 (조일수호조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심하게 불평등했습니다. 일본의 자유로운 해안 측량을 허가했고, 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일본인 영사가 심판을 했습니다. 부산, 원산, 인천 3개의 항구도 개항합니다.

그렇게 조선도 개항했습니다. 한중일 삼국 가운데 가장 늦은 출발입니다.

청나라는 영국에게, 일본은 미국에게, 조선은 일본에게 각각 당합니다.

세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다음 편부터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본의 역사를 설명하겠습니다.

메이지 정부가 세워지고, 일본은 본격적인 개화 작업에 들어갑니다.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요?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