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군, 그의 실제 역사 속 모습은 어땠을까?

2021. 1. 22. 20:09역사 탐구 연구

드라마 <철인왕후>에는 영평군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영평군의  역사 속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요?

철종 어진

출처: 문화재청

영평군은 철종의 이복 형입니다. 철종의 가족들은 매우 기구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평군과 철종의 기구한 인생 초반사는 조선 왕실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운의 세자 사도세자는 정조만을 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세자에게는 은언군이란 아들도 있었습니다. 은언군의 인생 부터가 비극과 비운이었습니다. 은언군은 그의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순교 사건에 휘말렸고, 그의 아들 상계군을 추대하려는 역모 사건에 휘말려 그러한 사건들에 연좌됩니다. 그리하여 은언군은 결국 순조의 즉위 이후에 죽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서자인 이광은 순조의 시대에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게 됩니다. 이광이 바로 전계대원군, 즉 영평군과 철종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영평군과 철종의 이복 형인 이원경도 역모 사건에 휘말려 죽고 만 것입니다. 이에 이욱(훗날의 영평군)과 이원범(훗날의 철종)결국 이광의 아들 철종이 헌종의 죽음 이후 조선의 왕이 되고, 이광은 전계대원군으로 추층됩니다. 영평군 이욱은 바로 철종의 이복형인 것입니다.

한양으로 가는 철종의 모습, 영평군도 철종이 즉위하자 한양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형인 영평군은 왕이 못되고, 동생인 이원범은 철종으로 즉위한 것일까요?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영평군은 병을 앓고 있었으며, 형이었던 회평군이 죽어야 했기 때문에 가계를 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영평군은 자신의 동생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한성으로 돌아왔고, 비로소 영평군이라는 군호를 받게 됩니다.

이후 영펴군은 왕실의 종친과 철종의 친족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철종 즉위년에 철종은 정조 시대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숙위소를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영평군을 숙위 대장에 임명합니다. 숙위소는 임금의 호위를 위한 임시 관청이었습니다. 영평군이 왕의 호위를 담당한 만큼 영평군에 대한 철종의 신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후 영평군은 계속해서 고위 관직으로 승진합니다.

철종이 자신의 생부와 생모를 추증하고 전계대원군묘를 만들자, 영평군이 제사를 받들게 됩니다. 가문의 제례를 잇는 사람으로 영평군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전계대원군의 묘 출처: 포천시

철종은 1863년에 죽지만, 영평군은 이후에도 아주 오랜 삶을 살게 됩니다. 고종이 즉위하자, 영평군은 종척 집사에 임명됩니다. 종척 집사는 장례 시기에 종친에게 임시로 주어지는 벼슬입니다. 이후 영평군은 이름을 이욱에서 이경응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나중에 고종은 영평군에게 양자를 들이게 합니다.

전교하기를,

"영평군(永平君)은 즉 전계 대원군(全溪大院阮)의 사자(嗣子)인데 몸에 고질적인 병이 있어 대를 이을 가망이 없다. 중요한 위치에 있어 계후(繼後)하는 절차를 조금이라도 미룰 수 없으니 종부(宗府)로 하여금 속히 의정(議定)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영평군은 고질적인 질병을 앓아 결국 양자를 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영평군은 자식을 낳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영평군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자식을 낳지 못하여 모두 양자를 입양하여 가계를 존속시켰습니다.

영평군은 아들을 입양한 이후 계속해서 왕실 종친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왕실의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을 교정하는 작업도 담당했습니다.

왕실의 족보 선원보략

사진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영평군은 만성적으로 소갈증, 즉 당뇨병을 앓았고, 결국 1902년 2월 1일에 병사하게 됩니다.

영평군은 1828년에 태어나 1902년에 죽으니 오랜 인생을 산 것입니다.

33년의 인생을 산 자신의 이복동생인 철종보다 훨씬 긴 삶을 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