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의 일대기: 불교의 보호자, 장수의 왕자

2021. 1. 24. 12:36역사 탐구 연구

이 글에서는 효령대군을 다룹니다.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세종)에 비해서 효령대군은 존재감이 좀 떨어지기는 하는데요, 사실 세 형제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간 인물은 바로 효령대군입니다. 엄청난 장수를 누린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효령대군 초상화

잘 알려져 있듯이 효령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이름은 이보입니다.

대군의 명호를 받고 왕자로서의 인생을 살던 효령대군은 형 양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후 세자는 충녕대군으로 교체되는데, 충녕이 바로 세종입니다. 효령은 세자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하는데요,

그 이유는 태종이 직접 설명해줍니다. 다음은 실록의 기록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369) 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충녕 대군 【휘(諱).】 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요약하자면, 자질의 미약함+올곧은 성질+술 못 마심 등을 이유로 효령은 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고 태종은 설명합니다.

술을 못 마신다는 점이 좀 사소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서 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수은 바로 사회생활과 외교 활동의 연장선이었던 것이죠. 외국의 사신을 만나 연회를 베풀거나 신화들과 잔치를 할 때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점은 왕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종은 이미 충녕대군을 세자로 생각해 두었으므로, 효령의 결격 사유도 어느 정도 만들어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효령대군은 대군의 인생을 계속 살아가게 됩니다. 이후 효령은 특히 불교에 심취하게 됩니다. 

조선의 불교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다

다양한 사찰을 지원하고, 불교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많은 불교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사찰의 중수와 수리에도 지원을 했습니다. 조선은 근본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의 국가였지만, 효령대군의 불교 활동은 불교를 보호하는 방패막이 되었습니다.

다만, 효령대군이 직접 승려가 된 것은 아니고, 불교를 믿고 관심을 가진 정도였습니다.

세조의 시대에 세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원각사를 창건하게 했는데, 효령대군은 원각사 조성도감의 도제조를 맡아 원각사의 건립에 관여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조선 초기 불교 건축의 걸작으로 불립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

 

엄청난 장수, 조선 왕실의 최고 웃어른이 되다!

효령은 자신의 동생인 세종과 형인 양녕보다 훨씬 오래삽니다. 

세종은 1450년에 승하하시고, 양녕대군은 1462년에 죽었는데, 효령대군은 1486년까지 살았습니다.

효령대군은 1396년에 태어났으니, 90년이 넘는 인생을 살다 간 것입니다. 이 수명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매우 길고, 당시 조선에서는 엄청난 수명이었습니다.

따라서 효령대군은 조선 왕실의 큰어른이 됩니다. 특히 양녕대군이 죽은 이후에는 효령대군은 독보적인 큰어른이 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복시(司僕寺)에 전지하여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에게 말 1필을 내려 주게 하였다.

성종실록

임금이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집에 거둥하여 위로하는 연회(宴會)를 베푸니,

성종실록

성종도 왕실의 큰어른인 효령대군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아들인 세종의 아들인 세조의 아들인 의경세자(덕종)의 아들인 성종이 왕으로 있을 때에도 살아 간 것입니다. 이렇게 길고 긴 삶을 살아간 효령대군은 1486년, 즉 성종 17년에 죽게 됩니다. 말 그대로 효령대군은 조선 초기 역사를 관통하는 인생을 살다 간 인물입니다.태조 이성계의 시대에 태어나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의 시대를 거쳐 성종의 시대를 살다 간 것입니다.효령대군은 조선 초기 숭유억불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불교문화와 예술을 보호하고 지원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효령대군은 수십년간 왕실의 큰어른이 되어 종친의 주축이 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