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한국사 3: 조선의 화폐 저화 조선통보 상평통보

2021. 1. 30. 10:54역사 탐구 연구

이 글에서는 조선 시대의 화폐를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선 전기까지도 한반도에서 화폐의 유통은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화폐의 유통이 원활해진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오늘은 조선 화폐를 살펴보고 후기에 화폐가 원활히 유통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의 초기 화폐로는 저화가 있었습니다.

태종은 사섬서에서 저화를 발행하여 유통하도록 했지만, 유통이 부진했습니다.

이후 세종도 화폐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세종은  조선통보라는 화폐를 주조하도록 하고 유통하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섬서가 이를 관장하도록 하고, 이후에는 주전소에서 이를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조선통보

동전(銅錢)을 주조(鑄造)할 것을 의논하였다. 처음 저화(楮貨)를 만들 때, 1장(張) 값이 쌀 한 말이고 30장 값이 목면(木緜)한 필이었는데, 이 때에 와서는 저화(楮貨)가 심히 천하여 1장에 쌀이 한 되[升]이고, 백여 장에 목면(木緜) 한 필이 되었다. 이에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의 관원을 모아서 동전을 만들어 저화(楮貨)와 같이 통용할 것을 의논하니, 호조에서 계하기를,

"동전은 곧 중국의 역대(歷代)에서 쓴 것이니, 청컨대, 당(唐)의 개원전(開元錢)으로 표준을 삼아 10전(錢)을 쌓아 무게 1냥쭝[兩]으로 하고, 전문(錢文)은 조선통보(朝鮮通寶)라 하고, 백성들이 동(銅) 1근을 바친 자에게는 전(錢) 1백 60문(文)을 주기로 하고, 사섬서(司贍署)로 하여금 이를 관장(管掌)하도록 하고, 사사로이 주조(鑄造)하는 자는 형률에 의하여 죄를 과(科)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후 

(생략)주전소(鑄錢所)를 두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6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

세종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조선통보를 유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뚝심에도 불구하고 조선통보는 제대로 유통되지 못했습니다.

조선통보

그 이유는 조선의 경제 구조에 있었습니다. 조선은 근본적으로 농본사회!! 농업 위주 경제의 조선에서는 시장과 상업이 발전하지 못했기에, 쌀과 무명과 같은 현물 화폐를 주로 사용했고, 동전은 유통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계속 밀고 나갑니다. 이제 조선통보를 쓰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결국 화폐를 신용하지 못했고,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습니다.

결국 세종은 화폐 정책을 거둡니다. 몇 안 되는 세종대왕의 실패한 정책입니다. 1445년에 저화를 대신 사용하기로 하면서 조선통보는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이후에도 세조가 팔방통보(전폐)를 주조하고 유통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고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이후  상평통보가 등장하게 되어 한국사에서 화폐는 점차 비중이 커집니다.

상평통보

상평통보는 인조 때 상평청에서 처음으로 주조되었습니다. 1633년, 김육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화폐들은 그나마 상업이 발전했던 개성을 중심으로 유통되다가. 병자호란의 풍파를 맞아 중단됩니다.

이후 김육은 다시 유통을 건의하여 효종 때 주조와 유통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상평통보 하면 떠오르는 임금은 숙종입니다.

숙종의 치세에 상평통보는 법정 화폐로 전국으로 유통됩니다. 다양한 관청에서 상평통보는 주조되었고, 퍼졌습니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고, 비로소 돈[錢]을 사용하는 일을 정탈(定奪)하였다. 돈은 천하에 통행(通行)하는 재화(財貨)인데 오직 우리 나라에서는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누차 행하려고 하였으되 행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동전(銅錢)이 토산(土産)이 아닌데다 또 민속(民俗)이 중국(中國)과 달라 막히고 방해되어 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대신(大臣)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 등이 시행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군신(群臣)에게 물어, 군신으로서 입시(入侍)한 자가 모두 그 편리함을 말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호조(戶曹)·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어영청(御營廳)·사복시(司僕寺)·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명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돈 4백 문(文)을 은(銀) 1냥(兩)의 값으로 정하여 시중(市中)에 유통하게 하였다.

상평통보

이렇게 조선 후기에 화폐의 힘이 강해졌던 이유에는 대동법이 있습니다.

대동법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을 쌀로 대신 내게 하는 제도인데 이 대동법으로 조선 정부는 공인들에게 필요물품을 직접 사오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업이 발전하고 화폐의 사용도가 높아진 것입니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화폐가 본격적으로 것은 조선 후기였습니다.

역사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세계사 이야기를 보고 싶으시면 제 유튜브 채널에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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