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공주묘, 발해를 알리다!

2021. 2. 4. 09:51남북국의 유물 유적

발해 정효공주묘 실측도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정효공주묘는 발해의 제3대왕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입니다. 발해의 3번째 왕인 문왕은 발해의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문왕의 두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굴되어 우리에게 발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정효공주의 무덤은 1980년에 발굴되었고, 정효공주의 무덤은 중경 화룡현 용두산에 위치해 있습니다. 정효공주묘의 벽화와 묘지명은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발해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 글에서는 정효공주묘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효공주 묘 벽화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정효공주 묘 안칸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정효공주묘는 벽돌무덤의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효공주의 무덤에는 당의 영향과 고구려의 영향, 그리고 발해만의 독특한 특색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먼저 당의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정효공주묘는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벽화에서도 당나라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효공주의 무덤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벽화에는 총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12명의 인물은 무사와 시위, 내사와 악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주인인 공주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먼저 무덤의 방으로 들어가는 안길에는 동쪽과 서쪽에 투구를 착용하고 낫과 장검을 들고 있는 문지기가 1명씩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의 방인 안칸의 동쪽과 서쪽 벽에는 각각 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동쪽과 서쪽 벽의 남쪽 끝에는 쇠낫과 장검으로 무장한 무사가 한 명씩 서있습니다. 동쪽 벽의 남은 세 명의 사람들은 붉은 색 보자기와 흰 보자기, 검은 색의 둥근 무언가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 벽의 남은 3명은 악기를 들고 있어 이들이 악사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벽에는 활을 가지고 붉은 우산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총 12명의 인물이 정효공주묘의 벽화에 그려져 있습니다. 인물들은 둥근 뺨과 통통한 볼을 가지고 있어 당나라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효공주의 무덤은 발해만의 독특한 특색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효공주묘는 고분의 봉토 위에 벽돌로 만들어진 탑을 조성한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은 발해가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엄연한 독자성을 가졌던 발해의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발해 정효공주묘는 고구려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정효공주묘의 천장은 평행고임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평행고임양식은 사각형 모양의 돌을 천장에 평행이 되도록 놓는 양식입니다. 평행고임양식은 고구려에서 유행한 양식이므로,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한 것입니다.

정효공주묘 벽화의 악사들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정효공주묘에서 또 중요한 것은 바로 묘지명입니다. 정효공주묘의 묘지명은 발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이 묘지명은 정효공주의 생애와 비범한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효공주는 매우 아름다웠고 마음씨가 고왔습니다. 그리고 여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지혜와 학식도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정효공주는 비운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어린 딸은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습니다. 공주는 슬픔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정효공주는 그녀의 아버지인 문왕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묘지명서는 다양한 서적과 유학 지식을 통해 발해의 번성과 공주에 대해 묘사하고 있어 발해의 발전된 학문 수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유교경전을 활용하고 있고, 공주의 이름인 "정효'에도 "효"라는, 유교의 핵심사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발해에선 유학이 융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묘지명에서 중요한 것은 문왕의 존호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입니다. 정효공주는 대흥 56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문왕이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의 다른 무덤인 정혜공주묘의 묘지명에서는 "보력"이라는 연호도 확인되어, 문왕이 대흥과 보력이라는 두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대흥"과 "보력"이라는 두 연호는 묘지명에 기록된 문왕의 이름에도 들어있습니다. 또 주목할 것은 "금륜"과 "성법"이라는 부분입니다. 이는 불교식의 용어입니다. 이를 통해 발해의 지배층에서 불교가 굉장히 융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 문왕은 "금륜 성법"이라는 칭호를 통해 불교적 성왕,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을 자처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불교는 매우 번성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묘지명에서 보이는 인용과 공주의 이름을 통해 발해에서 유학의 융성을 알 수 있고, 문왕의 이름을 통해 전륜성왕을 표방한 문왕의 위엄과 발해 불교의 융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효공주의 묘지명에서는 발해의 황제국적 면모와 자주성도 드러나 있습니다. 묘지명에서는 문왕을 "황상"으로 칭하고 있어, 문왕이 황제적인 지위를 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는 황제국의 면모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반이 됩니다.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독자적 면모를 가진 국가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정효공주묘의 묘지명은 발해 유교와 불교의 번성, 발해의 황제국적 면모를 모두 보여줍니다. 묘지명의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무릇 오래 전에 읽었던『상서(尙書)』를 돌이켜 보건대 요(堯) 임금은 두 딸을 규수의 물굽이에 내려 보내 순(舜) 임금에게 시집보냈고,『좌전(左傳)』을 널리 상세히 보건대 주(周) 천자(天子)가 딸을 제(齊)나라에 시집보낼 때에 노(魯) 장공(莊公)이 노관(魯館)을 지어 그 혼례를 주관하였다. 그러니 부녀자로서 갖추어진 덕이 밝고 밝으면 명예로운 이름이 어찌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로서 갖추어진 규범이 아름답고 아름다우면 선인(先人)들이 쌓은 은혜가 어찌 무궁하게 전해지지 않으리오? 조상들의 복을 물려받는 것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공주는 우리'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의 넷째 딸이다. 생각컨대 고왕(高王), 무왕(武王)의 조상들과 아버지 문왕은 왕도(王道)를 일으키고 무공(武功)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능히 말할 수 있으니, 만일 이들이 때를 맞추어 정사(政事)를 처리하면 그 밝기가 일월(日月)이 내려 비치는 것과 같고, 기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면 그 어진 것이 천지(天地)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야말로 우순(虞舜)과 짝할 만하고 하우(夏禹)와 닮았으며, 상(商) 탕왕(湯王)과 같은 지혜를 배양하고 주(周) 문왕(文王)과 같은 도략(韜略)을 갖추었다. 하늘에서 이들을 도와주니, 위엄을 베풀어 길하게 되었도다. 공주는 무산(武山)에서 영기(靈氣)를 이어받고, 낙수(洛水)에서 신선(神仙)에 감응 받았다. 그녀는 궁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순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은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웠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난 한 조각의 옥처럼 온화하였다. 일찍이 여사(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고 하였고, 매번 한(漢) 반소(班昭)를 사모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예악(禮樂)을 즐겼다. 총명한 지혜는 비할 바 없고, 우아한 품성은 저절로 타고난 것이었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그리하여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 그녀는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 부르는 것 같았고, 경대(鏡臺) 가운데에서 한 쌍의 난조(鸞鳥)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면 몸에 단 패옥이 소리를 냈고, 머물 때면 의복의 띠를 조심하였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한(漢) 원제(元帝)의 딸 경무(敬武)공주처럼 아름다운 봉지(封地)에서 살았고, 한(漢) 고조(高祖)의 딸 노원(魯元)공주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였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웠다. 그러나 남편이 먼저 돌아갈 것을 누가 알았으랴, 지모(智謀)를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어린 딸도 역시 일찍 죽어, 미처 실패를 가지고 노는 나이에 이르지 못하였다. 공주는 직실(織室)을 나와 눈물을 뿌렸고, 빈 방을 바라보며 수심을 머금었다. 육행(六行)을 크게 갖추고 삼종(三從)을 지켰다. 위(衛) 공백(共伯)의 처 공강(共姜)의 맹세를 배웠고, 제(齊) 기량(杞梁)의 처와 같은 애처러움을 품었다. 부왕(父王)에게서 은혜 받아 스스로 부덕(婦德)을 품고 살았다. 인생길이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달음질치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에 견고하게 감추어진 배를 쉽게 움직이는구나. 아아, 공주는 대흥(大興) 56년(서기 792년) 여름 6월 9일 임진일(壬辰日)에 외제(外第)에서 사망하니, 당시 나이는36세였다.이에 시호를 정효공주라고 하였다.이 해에 겨울 11월 28일 기묘시에 염곡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다.이것은 예의에 부합된다. 황상은 조회마저 금하며 몹시 비통해 하시며,침식을 잃고 노래와 춤 추는 것도 중지하였다.상사와 장사에 관한 의식은 관부에 명령하여 빈틈없이 준비하였다. 상여꾼들이 목 메는 소리 발길 따라 머뭇거리며,영구차을 끄는 말이 뒤를

돌아보며 우는 소리,들판 따라 오르내리네! 악장공주처럼 사망한 후,영예는 숭릉보다 높았으며 평양공주의 장례식을 본

받아 영구을 잠시 멈춰 놓았다가, 일후 정식으로 안장하기을 기다렸다. 황산의 굽을 곳에 묘지을 정하였으며 묘지 주위에는 소나무,가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강물이 굽이친 곳에 지어 놓은 분묘는 깊고도

어두었다. 애석하도다! 공주와 이별하자니,이를 영원히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우고 비명을 새겨두노라!

위대하고도 밝은 선조들은 어지러운 천하을 통일하고 인정과 상벌을 분명히

하여 실시하니 그 덕이 온 천지에 미치게 하였으며 부왕 때에 와서는 국세가

강성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장구하게 되었다.그들이야말로 3황5제와 짝으로

될 만하고 성왕과 강왕의 치국 정책을 실시한 이들이다.

공주는 세상에 태어난 후,어려서부터 참으로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영민하였

으며 지식이 넓고 멀리 내다보는,궁중에서 본보기로 되었으며 태자의 누님

이었다. 그 얼굴이 옥처럼 아름다워 무궁화 꽃만이 비할 수 있었다.이것이

둘째이다.

한강여신의 영기와 고당여신의 정기을 받았으며,그 자태는 아름다우며 훌륭한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다.군자에게 시집을 가서 님을 공대하고 님에게 유순하였으므로 그 명성이 높았다.그들은 원앙새처럼 짝을 이루었으며,봉황새처럼 사이좋게 속삭였다.이것이 세째이다.

님은 일찍 세상을 하직하고,음과 양의 길이 각각 달라 마치 한 쌍의 난조가

갑자기 등을 지고 날아가 듯,짝을 이룬 자웅 검이 따로 떨어져 있듯이 외롭게지내었다. 그는 고결한 지조을 굳게 지켰으니,마땅히 이를 역사책에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그는 부덕에 의해서 행동하고,정절을 지키는데 훌륭하였다.이것이 네째이다.

공주는 (상중)에 나오는 음란한 시을 싫어하였으며,(백주)에 씌여 있는 시을

즐기었다.그는 아주 어진 사람이었으나 근심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았는데,

세월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장례도 끝나고 영구차도 돌아갔다.사람들이 그의영혼을 천당으로 모실 때,주악 소리에 슬퍼하는 목메어 슬피 울기도 하였다.이것이 다섯째이다.

강변과 뭇산으로 에워싸인 작은 산에 자리 잡은 관의 자리는 어느 때에 가서야 광명을 다시 볼 수 있으며 무덤 언덕은 얼마나 세월이 지나야 하는가? 묘우에는 고목이 무성하고 안개가 자욱하리라.묘의 입구을 갑자기 봉하자니 처량한 기분이 든다. 이것이 여섯째이다.

정효공주묘는 천장의 평행고임양식을 통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고, 벽화의 화풍과 벽돌무덤 양식을 통해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며, 고분의 봉토위에 탑을 조성하여 독자적인 발해만의 특색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정효공주의 묘지명에서는 발해에서 융성한 유학과 불교의 모습, "황상" 호칭을 통한 발해의 황제국적 면모가 모두 드러납니다. 정효공주 무덤은 우리에게 발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보물창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