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사 이야기: 러일전쟁 이후의 조약들

2021. 2. 23. 11:11일본의 근대사

러일전쟁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러일전쟁  과정과 이후의 조약을 살펴보겠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선전포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이 조약으로 일본에 군사상의 편의를 제공해야 하였고,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은 수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심지어 청나라에게도 중립 수용을 강요하였습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와 일본은 강화 조약의 교섭에 들어갑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주로 대립한 주제는 사할린의 양여문제와 전쟁 배상금의 문제였습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은 우월한 지위를 자신들이 가질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 황제 통치권을 보장할 것을 일본에 주장했지만, 결국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 종식의 상징이 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

사할린 섬의 북위 50도 이남의 지역이 일본에 할양되었고, 일본의 한국 보호권이 승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요동반도 조차권도 일본이 가져가게 되었으며, 장춘과 여순의 철도권도 일본이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

그런데 일본 국민의 여론은 이 포츠머스 조약에 대해 무지 험악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에게 배생감은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협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히비야 공원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심지어 과격파는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히비야 폭동 사건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도 큰 피해를 입고 승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의 국민들도 계속된 전비 조달과 상처의 승리를 보고 반감을 가진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자금을 써대며 전쟁을 했는데도 배상금을 못 받았다 하니 이 조약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이죠.

히비야 공원의 시위

이 히비야 폭동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부정벅으로 바라보는 주장에서는 이 히비야 폭동 사건이 제국주의를 촉진했다고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히비야 시위가 민중의 정치 참여를 시사한 사건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 포츠머스 조약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독점하고 강화합니다.

을사늑약

조선에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것도 이러한 일본의 본격적인 야욕을 잘 보여주죠.

결국 대한제국은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이후 자주성과 외교권을 상실하고 통감의 간섭을 받았으며, 보호국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본은 또한 고무라 주타로를 총나라에 파견하여 러시아가 조차권을 가지고 있던 요동 반도, 철도권을 가지고 있던 장춘과 여순에 대한 인계 승인을 받게 됩니다.

고무라 주타로

일본은 이 포츠머스 조약 이후로 조선과 요동, 장춘과 여순에 너무나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 속에서도 일본의 이러한 침략적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전쟁과 학살을 반대한 일본인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 역사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