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명 그릇

2020. 12. 31. 17:01삼국의 유물 유적

호우명 그릇

호우총에서 출토되다

호우명 그릇은 '호우총 청동 그릇', '광개토대왕공적기념호우', '호우총 출토 청동 그릇'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호우명 그릇은 경주의 호우총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호우총은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아닌 한국인들의 손으로 발굴한 최초의 고분입니다. 그러나 의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삼국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 특히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물인 '호우명 그릇'이 바로 호우총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호우명 그릇의 바닥
호우명 그릇의 바닥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다

호우명 그릇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릇입니다. 이 그릇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그릇의 바닥에 있습니다. 호우명 그릇의 바닥에는 4행 16자의 명문이 돋을새김되어 있습니다. 그외에 상부 중앙에는 ‘井’이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井’의 의미는 아직까지 밝혀지진 못했습니다. 중요한 4행 16자의 그 명문은 바로 이렇습니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풀이하자면 '을묘년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호우'로 풀이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광개토'보다도 이름이 길죠?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긴 이름은 장수왕이 자신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나타납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죽은지 3년이 지난 415년으로 풀이됩니다. 즉, 이 그릇은 장수왕의 재위기인 415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호우명 그릇이 출토된 무덤인 호우총은 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감안한다면, 호우명 그릇은 만들어진지 백년뒤에 묻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점이 한가지 생깁니다. 광개토대왕은 분명 고구려의 국왕인데, 이 그릇이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이상할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살펴보아야합니다.

4세기 후반 신라의 군주였던 내물마립간은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파견하는 등 고구려와의 관계를 밀착시켰습니다. 이후 신라에 왜가 침입해오자, 광개토대왕은 위기에 빠진 신라를 도와 군사를 보내어 왜를 격퇴합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된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상세히 설명됩니다.

10년(400년)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 國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그래서 라인(羅人)을 戍兵으로 두셨다.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 옛적에는 신라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하여)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 조공하였다.

- 광개토대왕릉비

바로 400년에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파견해 신라를 지원하여 왜를 격퇴하게 되었고,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고구려의 문물이 신라에 다수 유입된 것입니다. 호우명 그릇은 이러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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