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1. 09:40ㆍ삼국의 유물 유적
출처: 문화재청
삼국과 불교, 그리고 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삼국 시대 불교 미술의 정수인 반가사유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모두 불교를 수용했습니다. 불교는 고구려에는 소수림왕 시기에 수용되었고, 백제에는 침류왕 시기에 수용되었으며, 신라에는 눌지왕 시기에 수용되고 법흥왕 시기에 공인되었습니다. 불교는 삼국의 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삼국은 절을 창건하였고, 불상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결과물 중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것은 바로 반가사유상일 것입니다.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를 틀고 사유하는 (생각하는) 모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년(서기 372) 여름 6월, 진(秦)나라의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임금에게 불상과 경문을 보내 왔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 답례로 토산물을 바쳤다.
임금이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二年 夏六月 秦王苻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立太學 敎育子弟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의 소수림왕 [小獸林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9월,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나라에서 오자, 임금이 맞이하여 궁내에 모시고 공경하였다. 이때부터 불법(佛法)이 시작되었다.
枕流王 近仇首王之元子 母曰阿尒夫人 繼父卽位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 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네이버 지식백과] 백제의 침류왕 [枕流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15년(서기 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일찍이 눌지왕(訥祗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으나,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어보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알려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태우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한 곳에 정성이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태우며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임금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임금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다. 딸의 병이 곧 나았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가 왕성에서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받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며 말하였다.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阿道)[혹은 아도(我道)라고도 한다.]가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 시중을 들던 세 사람은 계속 머물러 살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불법을 믿는 이가 종종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하였으므로 임금이 난감해 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異次頓)[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저의 목을 베어 뭇 사람들의 분분한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본래 불도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저는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모두들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며, 말하는 논리가 괴상하여 정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저희들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홀로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의 심오함을 들어보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말이 단단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구나.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 쪽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
마침내 형리에게 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의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가 죽고서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았는데 그 빛깔이 우유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十五年 肇行佛法 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句麗至一善郡 郡人毛禮 於家中作窟室安置 於時 梁遣使賜衣着香物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徧問 墨胡子見之 稱其名目曰 此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未有過於三寶 一曰佛陁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 時 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餽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 俄而不知所歸 至毗處王時 有阿道[一作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至是 王亦欲興佛敎 群臣不信 喋喋騰騰口舌 王難之 近臣異次頓[或云處道]奏曰 請斬小臣 以定衆議 王曰 本欲興道 而殺不辜 非也 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 無憾 王於是召群臣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異次頓獨曰 今群臣之言 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 王曰 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此據金大問雞林雜傳所記書之 與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所錄 殊異]
[네이버 지식백과] 신라의 법흥왕 [法興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출처: 문화재청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이름처럼 반가사유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발을 왼다리에 올리고 오른팔을 오른 다리의 무릎에 올리고 볼에 손가락을 대어 생각하는 , 사유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 반가사유상은 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모양은 탑과 유사합니다. 세 갈래로 솟아오른 장식은 일월 또는 보주라고 불립니다. 태양과 달을 결합한 형식이기에 일월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지만 볼과 눈이 강조되어 강한 인상도 줍니다. 가늘게 뜬 눈과 올라간 입꼬리는 미소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웃음은 중국의 다른 불상에서도 보이지만, 얼굴의 가득한 미소의 모습은 한국식 보살의 특징입니다. 이 작품은 개성과 미소를 모두 갖춘 한국형 불상을 처음으로 구현한 불상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상체는 매우 늘씬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줍니다. 손과 발의 크기가 팔과 다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편이고, 팔다리의 곡선미와 윤곽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만들어 냅니다. 신체의 탄력성을 표현하여 불상의 우아함을 드러냅니다.
천의는 목 뒤를 돌아 어깨와 가슴을 지나 왼다리에서 서로 교차된 다음 무릎과 팔을 감아 내려옵니다. 이러한 천의 모습은 부드러움과 곡선의 아름다움을 한껏 더합니다. 곡선의 몸과 곡선의 천의의 부드러움은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을 줍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하체의 치마는 두께가 있어보이면서도 탄력있게 나타납니다. 옷 주름은 U자형으로 잘 새겨져 있습니다. 치마 주름의 능숙한 표현은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의 왼쪽 발은 대좌에 올려져 있습니다. 대좌는 연꽃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적 특징을 연꽃을 통해 더하고 있습니다.
출처: 문화재청
어느 국가의 것인가?
그런데 이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어느 국가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신라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 고분 벽화인 사신도의 양식과의 유사성, 고구려에서 북위 양식의 불상이 유행했고, 이 불상이 그와 유사하다는 점 등을 토대로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어, 삼국 모두에서 제작설이 제기되어 하나의 국가로 특정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특히나 반가사유상은 삼국 모두에서 널리 제작된 불상이기에 더욱 확정이 힘듭니다.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 유력한 반가사유상도 있고,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이 명백한 반가사유상도 있기에 반가사유상은 삼국 보편의 불상인 것입니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문화재청
출처: 문화재청
정리하자면,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한국형 불상의 정수를 드러내며, 편안하고 안정감있는 미소는 마음의 평안을 선사합니다. 곡선을 이용한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인상은 이 유물이 국보의 가치를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삼국의 유물 유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0) | 2021.01.11 |
---|---|
천마총의 국보 보물 (0) | 2021.01.11 |
고구려의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국보 118호 (0) | 2021.01.11 |
황남대총 남분 은관 (0) | 2021.01.11 |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0) | 2021.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