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2021. 1. 11. 12:02삼국의 유물 유적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출처: 문화재청

대표 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반가사유상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유물일 것입니다. 삼국은 불교를 수용했고, 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반가사유상도 그러한 불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를 틀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형상을 의미합니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반가사유상들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아름다움과 가치가 최상위급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불상의 높이는 93.5cm이며, 국내의 금동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큰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얼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출처: 문화재청

대표 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반가사유상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유물일 것입니다. 삼국은 불교를 수용했고, 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반가사유상도 그러한 불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를 틀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형상을 의미합니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반가사유상들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아름다움과 가치가 최상위급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불상의 높이는 93.5cm이며, 국내의 금동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큰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얼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상반신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얼굴은 원형을 연상시키며 풍만합니다. 눈가와 입에서는 포근한 미소가 드러납니다. 머리에는 3개의 산처럼 보이는 장식이 있는 삼산관이 쓰여져 있습니다. 목에는 두 줄의 목걸이가 걸려 있습니다. 관에는 장식이 없고 단순한데, 인도나 중국의 관에서는 찾기 힘듭니다. 상반신에는 옷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볼에 대는 손가락은 매우 생기있게 표현되었습니다. 반가사유상에서 표현에 있어 가장 고난도인 부분은 바로 오른팔인데, 다리와 볼에 모두 접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금동 반가사유상에서는 무릎과 팔의 조절을 통해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하반신

하반신에는 치마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치마의 주름과 자락은 아주 유기적이고 섬세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왼발을 연꽃 문양이 담긴 대좌에 올리고 있습니다. 오른발의 발가락은 구부리게 표현하여 생동감을 드러냅니다. 오른무릎을 보면 이 불상이 금으로 칠해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색이 영롱하게 남아있는 부분이 보입니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뒷면

반가사유상의 뒷면을 보면 머리 부분에 촉이 튀어 나와 있는데, 이를 통해 광배가 장착 되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배는 불상의 뒷면에 다는 빛을 의미하는 장식입니다.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을 보시면 불상 뒤에 커다한 판이 있는데, 그것이 광배입니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옆모습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시대 불교미술의 절정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엄청난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닙니다. 옷주름과 인체의 유기적이고 자연적 표현, 정교한 이목구비와 복장의 표현이 불상으로서의 가치를 더합니다. 얼굴의 편안한 미소와 사유하는 자세의 안정감은 숭고미를 풍기며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삼국 시대 불교 미술의 절정이자 정수인 것입니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출처: 문화재청

어느 나라의 것인가?

그런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정확히 어느 국가의 반가사유상인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대립하는 것은 백제에서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신라에서 만들어졌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유사한 모습을 가진 일본 고류사의 반가사유상의 재질이 경상도의 적송이라는 점과(경상도는 신라의 영역), 일본서기에 신라의 불상을 모셨다는 기록 등을 토대로 신라의 것이라는 주장이 통설이고 유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교한 조각술이나 백제의 불교 조각에서 보이는 미소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어 확정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반가사유상의 사유
윗모습
뒷모습
연꽃무늬 대좌의 모습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일본 교토의 고류지 목조 반가사유상
고류지 목조 반가사유상

국보 83호 목조 반가사유상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 측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고류지의 목조 반가사유상은 삼산관의 형태와 신체의 형상, 옷주름과 얼굴과 자세의 표현 등이 매우 유사하여 한일 문화교류의 산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신라의 불상을 안치했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 불상이 바로 목조 반가사유상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서기 추고천황 31년 (623년) 7월

31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대사 나말 지세이(智洗爾)를, 임나가 달솔 나말(達率奈 末) 지(智) 를 파견하여 함께 내조하였다. 그리고 불상 1구 및 금탑과 사리를 바쳤다. 또 큰 관정번(觀頂幡)1구와 작은 번 12개를 바쳤다. 곧 불상은 갈야(葛野;카도노)의 진사(秦寺;우츠마사데라)에 안치시켰다. 그 외 사리와 금탑·관정번 등은 모두 사천왕사(四天王寺;시텐와우지)에 봉납하였다. 출처: 동북아 역사넷

그리고 일본의 불상들은 주로 녹나무로 만들어지는데, 이 고류사 목조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의 경상도에 많은 적송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 확인되어 이 불상이 한국과 일본의 교류의 산물이라는 점이 더욱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정리하자면,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인자한 미소와 섬세한 옷주름, 그리고 유기적인 신체의 조각 등을 통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크기는 우리나라의 금동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크며, 일본의 고류지 목조 반가사유상과도 형태가 유사하여 한일 문화교류를 시사하는, 많은 의미를 가진 귀중한 국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