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지석

2021. 1. 13. 11:39삼국의 유물 유적

무령왕릉 지석

출처: 문화재청

무령왕릉 지석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입니다. 국보 163호 입니다. 무령왕릉은 백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고분입니다. 무령왕릉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고, 그 중에는 국보로 지정된 것도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무령왕릉의 핵심적인 유물 가운데 하나인 무령왕릉 지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령왕릉 지석은 지석입니다.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치를 때 땅의 신에게 무덤으로 사용될 땅을 산다는 내용을 담은 매지권입니다.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지석이 각각 한 매식 발견되었습니다. 왕의 지석은 가로가 41.5cm이고, 세로가 35cm입니다. 5에서 6cm의 선을 새기고 그 내부에 글을 새겼습니다. 글의 내용은 삼국사기의 무령왕에 대한 설명과 일치합니다. 글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戊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조 登冠大墓立志如左(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 무령왕릉 지석 중 무령왕의 지석

무령왕의 별칭으로 사마왕을 사용하고 있고, '영동대장군'이라는 명칭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인 양나라로부터 책봉된 관직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양나라가 무령왕을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한 기록이 있습니다. 무령왕이 사망한 해는 523년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며, 사망한 달은 5월로 이 또한 삼국사기와 일치합니다.

21년(서기 521) 여름 5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가 9백 호였다.

겨울 11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나라가 쇠약해진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표문을 올려서 일컫기를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12월, 양 고조(高祖)가 조서를 보내 임금을 책봉하여 말하였다.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여륭(餘隆)은 바다 밖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고, 그 정성이 지극함에 이르니 짐은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예로운 책명을 수여하여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으로 삼는다.”

二十一年 夏五月 大水 秋八月 蝗害穀 民饑 亡入新羅者 九百戶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 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 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迺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네이버 지식백과] 무령왕 [武寧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무령왕의 지석의 뒷면에는 네모의 구획을 긋고 12방위를 표기했습니다. 그런데 서쪽 부분은 표시가 없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릉 지석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비의 지석도 만들어 졌는데, 가로와 세로의 길이는 무령왕의 지석과 같습니다. 2.5cm에서 2.8cm 폭으로 선을 그리고 4행으로 새겼습니다. 선은 13행을 그렸으나 남은 부분은 비워둔 채 남겼습니다. 526년에 무령왕비가 죽자 529년에 왕과 합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뒤에는 땅을 샀다는 문서인 매지문을 새겼습니다. 일만문의 돈으로 토지를 사들여 무덤을 마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글씨체는 중국 남조의 풍채를 보이고 있습니다. 무령왕비의 지석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 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 還大墓立 / 志如左

앞면

돈 1만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 不從律令

뒷면

무령왕릉 지석

출처: 문화재청

무령왕릉 지석은 무령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지석을 통해 매지권이라는 백제의 매장 풍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남조의 필체를 통해 남조와 백제의 문화교류도 짐작할 수 있고, 무령왕의 사망과 별칭등의 기록을 확인하고 얻을 수 있게 합니다. 무령왕릉 지석은 많은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지석은 국보 제163호로 지정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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